아무도 그가 정말로 당신이 알고 있는 그라는 사실을 보장해줄 수 없다. 세계는 허상과 기만의 톱니바퀴 위, 헌 부품을 새 것으로 갈아 끼워도 인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간다. 그는 어제와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로 당신에게 인사한다.

그러나 당신은 똑같은 미소로 똑같이 웃는 그가 정말로 당신이 알고 있는 그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지옥은 결코 멀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와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 확신할 수 없음이란 곧 지옥이나 마찬가지이므로.



A Hades Beneath the Skin 

껍데기 아래의 지옥

w. Serinos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외마디 헛숨을 들이키며 신무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시침은 2와 3 사이에서 고요한 창밖에는 이른 새벽의 가라앉은 풍경이 아른거린다. 멍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 시력을 조절하기 힘들다. 어지럽게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사물들의 상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그는 다시 눈을 감는다. 관자놀이 부근이 욱신거린다. 아주 오래 잠을 잔 것처럼 정신이 얼떨떨해 잠시 상황 파악이 지체된다. 뒤흔들리던 시야가 간신히 안정을 되찾고, 기억은 밀물처럼 돌아와 텅 빈 머릿속을 채운다.


의식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떠올리고 기억하고 인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스러움이 숨통을 조여 온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탄식을 내뱉는다. 선명하게 드리우는 악몽의 그림자. 차라리 진짜 악몽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뭉게구름에서 뽑아낸 실에 은하수를 한 겹 덧발라 쌓은 새하얀 색채가, 거짓말 같은 붉은빛에 물들어, 흙바닥에 처박히던 광경. 팔이 잘리고, 눈이 뽑히고, 목이 찔려서, 붉은빛에 물들어 죽은 사람.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무영이라는 사내는 어쩔 수 없이 속정이 깊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은 그가 마음의 아주 작은 구석조차 허락하지 않은 타인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일단 구역을 나누어 할당하고 나면, 그 자에게 배정된 자리는 영구히 그곳에 위치한다. 설령 그가 죽더라도, 빈자리는 그대로 남아 허망한 심정을 부추긴다.


죽은 이, 단순히 많이 먹고 한심한 식객에 불과했던 이는, 온 사방을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며 영역을 넓히곤 했다. 흡사 영토를 넓히는 늑대와도 같았다. 이것은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여지없이 대응되는지, 그가 제 안에 얼마나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고 나자 신무영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한 줄은, 그가 죽기 전까지는 조금도 몰랐는데.


그런데 그걸 이렇게 알게 하기냐.


입술을 짓씹으며 타박해봤자 원망할 상대는 이미 세상에 없다. 대상의 부재로 인해 벌어진 상처자국은 더더욱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간다. 나름대로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이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은 다른 하나의 죽음과 결부되어 그를 구렁으로 들이민다.


유진.


한 마디 떠올려 부르면 그리움과 애틋함이, 다시금 되뇌이면 분노와 황당함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절망이 뒤꽁무니를 쫓아온다. 무엇으로 씻어낼 수 없는 허망감이 뇌를 녹신하게 적셔 이미 한계치에 도달해 있던 사고는 한 사람의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채 폭주한다. 유진, 그 이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껍데기. 차라리 생각을 물리적인 힘으로 멈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내달리는 생각에 휩쓸려 신무영은 점차 벼랑 끝을 향한다.


유진은 가짜, 그에게 손 내밀었던 구원도 가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에 침몰한 그를 건져올린 속삭임 하나조차도 가짜. 껍데기를 벗은 실체의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며 침울하게 가라앉은 황안을 떠올리며 그는 자조한다. 그 껍데기가 말도 못하게 추악하거나 불완전한 존재였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에서 실종된 아이를 대신해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껍데기는 치가 떨리도록 또렷한 자아를 가졌었다. 오롯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던 노란 눈은 수선화 꽃그늘과 이국의 금화를 닮은 반짝임으로 인해 기가 차도록 또렷했다.


정말, 기가 차도록. 억눌린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입가를 비집고 튀어나간다. 쥘 생각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손가락이 바닥을 긁었다. 소리를 부여받지 못한 절규는 그 짤막한 행위를 통해 어설프게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한 사람은 목숨을, 잃었고, 한 사람은 존재를 부정당했다. 두 개의 죽음으로 인해 무영은 다리를 잃은 의자처럼 휘청이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랑아?


문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의 끝자락에는 낮은 불안과 기대가 걸쳐 있다. 랑아, 일어난 거야?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그나지오. 그래...그래도 너는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인 그를 보며 이그나지오가 지긋이 입술을 깨문다. 분명 마음고생이 심하겠지. 그가 무어라 더 말을 꺼내려는데, 걱정과 난처함을 반반씩 담은 물음이 불쑥 끼어든다.


뭐야. 괜찮아, 검은 것?


그 뒤따른 목소리에 동공이 바짝 수축한다. 완전히 모순적인 정보가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비상경보가 울리고, 충격으로 새하얗게 말소된 사고의 무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잠깐, 잠깐만. 보기 좋게 그을린 살결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희끄므래한 푸른빛을 머금는다. 비할 바 없이 좋은 시력에 비친 얼굴은, 틀림없이- 죽은 이의 것이었기에.


아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던 것도 같다. 그는 아주 두려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린다. 랑아? 왜 그래? 놀라서 제 팔을 붙잡고 물어오는 쌍둥이도, 그 순간만큼은 인식의 범위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그 순간 까맣게 이어진 선분의 한쪽 끝에는 신무영이, 그리고 다른 한쪽 끝에는, 은율이 있었다. 뭐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찌푸리는 미간, 못마땅함으로 굳어진 입매, 서운함과 걱정스러움이 적절히 섞인 눈동자, 짝다리를 짚고 대충 선 자세, 머리카락보다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하얀 손가락을 오므려 벽이나 가구를 툭툭 초조하게 두드리는 습관.


그러나- 아니었다. 백정이 아니다. 신무영은 제 모든 사고를 다해 확신한다. 숨이 턱 막히고 손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그 생각만큼은 선명했다. 분열되고 쪼개져 서로를 향해 왕왕거리던 의식들이 처음으로 의견을 일치시킨다. 그는, 백정이, 아니다. 정신없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 얼굴을 바라보자 소름이 쭈뼛 돋는다. 긴 세월 마주한 건 아닐지라도, 제가 받아들인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할 친숙함도 익숙한 기색도 아무것도 없다. 겉모습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똑같은데도. 목구멍에 가시가 돋아나 기도를 찌르는 것만 같다. 몇 번의 시도 끝에서야 토막난 말들을 간신히 내뱉는다.


너, 누구야.



카그라스 신드롬(Capgras Syndrome):

망상적 동일시의 일종. 가까운 친구 또는 가족이 생김새만 똑같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뒤바뀌었다고 믿게 되는 증후군의 통칭.



은율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진다. 이그나지오가 당황한 얼굴로 제 형제의 손목을 더 꽉 쥐었다. 왜 그래, 랑아. 백정이잖아. 백정탈. 기억 안 나? 당혹감을 한 움큼 펴 바른 얼굴임에도 목소리만큼은 달래듯 조곤조곤하다. 무영이 고개를 젓는다. 입술을 물어뜯자 비릿한 피맛에 베어나는 것이 불쾌하다. 입을 여는데 식은땀이 죽 흘렀다.


그 녀석은 죽었어.

죽을 뻔했지.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 취급하기냐, 섭하게시리.


투덜거리는 목소리마저도 지나치게 제가 아는 백정을 닮아서, 신무영의 어깨가 크게 움찔한다. 파들거리는 눈동자는 둘 곳 없이 방황하다가 바닥에 닿는다.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맥을 짚었어.


그가 말을 잇는다. 애초에 살아있을 수 없는 상처라는 걸 알았는데도, 흘러나온 피만 봐도 죽은 게 뻔했는데도, 부정하고 싶어서 일부러 맥을 짚어봤었다고. 속삭임의 끝에는 눈물 섞여든다. 목, 손목, 팔목 안쪽. 생의 증거로서 날뛰는 생명의 아주 흐릿한 잔상이라도 찾기 위하여 그는 부질없는 시도를 반복했다. 물론 결과는 은율의 죽음을 세 번이나 증명한 꼴이었다. 선비탈에게 재차 그가 정말로 죽었느냐고 물었고, 물을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새로운 증거가 되어 죽음을 결론지었다.


아니, 죽었, 그러니까 죽을 뻔한 건 맞는데- 처용 그 형씨랑 이야기가 여차저차 돼서. 원래였다면 죽었겠지만 내 몸뚱이가 워낙 튼튼한 것도 있고...


답답하다는 듯이 양팔을 마구 허우적거리며 토로하던 은율이 팔과 목의 꿰맨 자국을 드러내보이며 첨언한다. 눈은 의안. 설마 이거 바꿨다고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이후 그가 신무영과 똑바로 눈을 마주하며 선언한다. 존재를 증명하려는 본능과 상대를 설득하려는 이성이 섞여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였다.


아무튼 나라고. 백정탈, 은율.


거짓말. 비명과 신음 중간 정도의 소리가 반쯤 벌어진 입술 새로 빠져나왔다. 놀라움의 수긍도 체념도 아니었다. 두려움에 벌벌거리면서도 완고하게 거부하는 어조. 고통을 잔뜩 끌어안고 흉흉하게 노려보는 눈동자에 은율은 할 말을 잃는다. 진짜로? 답지 않게 힘없는 목소리 끝이 불안정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적개심 가득한 시선을 마주 바라본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울 듯한 얼굴로 되려 이를 가는 것은 황당함을 넘어 두려웠다. 저를 내다보는 신무영의 시선에는 그 어떤 친근감도 친숙함도 익숙함도 없다. 그러니까- 신무영에게 있어 지금의 그는 은율이라는 차차웅과 얼굴만 똑같은 전혀 다른 존재인 것이다.


다급한 호출에 한달음에 달려온 선비탈은 꽤 최신 것으로 보이는 의료 서적을 뒤적거리더니 곧 진찰을 시작한다. 정신적인 분야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해도 그는 뛰어난 의사였고, 신무영의 증상이 무엇이 뜻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곧바로 한숨이 터져나오고, 그는 특유의 사투리로 작게 넋두리를 흘린다. 비척비척 일어서 방문을 열고 나오자 은율이 잽싸게 물어온다.


선비, 진찰 끝났어? 저놈 왜 저러는 거야?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물어뜯은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이놈아, 아무리 배고파도 그건 묵는 거 아니다. 가볍게 핀잔을 준 뒤 그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한다. 이후 쏟아져 나오는 전문용어와 병명들에 은율의 얼굴이 다소 미묘하게 변한다. 그러던 중 경청에만 전념하던 은율이 한 시점에서 말을 끊고 되물었다. 카그, 뭐? 카그라스 신드롬이라 안카냐. 하여튼 그노마 그거, 정신적으로 쪼까 내몰린 노마라고는 생각혔는디 그까정 심각한 줄은 내도 몰랐다. 선비탈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대꾸했다.


가끔 인간과 가까운 차차웅 노마들도 걸리는 증후군이라 배워는 놨지마는...니들도 알다시피 내는 정신 같은 불확실한 건 치료 못 헌다. 저건 그노마 본인이 니가 진짜 백정이란 걸 인정해야만 쓴다.

그렇지만 왜 갑자기 내가 나라는 걸 못 믿는 건데?

그만큼 니 죽음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됐다는 기다, 망할 놈. 정신적인 충격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은 것도 원인이고. 그노마는, 그 뭐시냐...


드물게 말을 명확히 잊지 못한 채 선비탈이 곰방대를 입에 문다. 지체된 시간은 잠시였고 결국 내뱉어야만 하는 답이기에 낭비나 다름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그가 입을 연다. 무진장 혼란스러울끼다. 유진이 2대 왕의 껍데기, 그냥 허상에 불과했다는 말을 들은 뒤로, 지 앞에 있는 노마가 정말 그 노마라는 확신이 안 스겠지. 껍데기가 아무리 그럴 듯혀도, 속에 있는 게 무신 놈인지는 모르니께. 유진 안에 있던 2대 왕을 우리가 몰랐던 것처럼.


선비탈이 돌아간 뒤, 은율은 속에 납이 들어찬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그의 진찰을 곱씹는다. 음식을 씹는 둥 마는 둥 하며 삼켜버리던 습관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를 아주 긴 시간을 들여 꼭꼭 씹어먹듯이. 그러니까, 지금의 신무영은 자윤이 의도치 않게 속인 것 때문에 맨탈이 나간 모양이었다. 이번만큼은 제 친우가 실수했다고 느끼며 은율이 머리를 긁적였다. 의도한 건 아니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관계의 종말을 내려버리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전부 가짜였다고, 껍데기였다고 해버리는 건.


아. 문득 뒤통수를 때리는 깨달음에 머리를 긁던 손이 얼어붙는다. 혹시, 그는. 신무영이 의식을 되찾고 처음 마주쳤던 날 뒤로 열리지 않게 된 문이 은율의 눈에 박히듯 들어온다. 혹시 그는 그저 혼란스러운 것뿐만이 아니라. 기척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에 손을 짚는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파악하는 백정탈의 눈에는, 그 너머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존재가 흐릿하게 비쳐 보였다. 신무영. 차마 부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그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마음이 진정되고, 두 명 분의 죽음-저는 살아남았으므로 사실상 유진 한 명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날 때쯤이면 그는 자신과의 생활에 익숙해졌을 테고, 차츰 이전에 느꼈던 친숙함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에 민망한 얼굴로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사과하겠지. 못 알아봐서 미안했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문에 짚은 손에 미약하게 힘이 들어간다. 문 너머에서 그는 또다시, 상처투성이 왼팔에 칼을 가져간다. 멍청한 자식. 눅눅한 절망이 발목에 들러붙어 자꾸만 타고 올라온다. 그는 생각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혹시 네가 그저 혼란스러워하는 게 아니라면. 두려워하는 거라면. 껍데기가 벗겨졌을 때의 처참한 결과, 맹목적으로 따르던 구원과 그에게 쏟아낸 애정과 헌신이 전부 헛것이었다는 통보, 허상과 기만을. 자윤이 그랬듯이, 누군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껍데기였다고 해버릴까 봐.


굳게 닫힌 문의 너머, 신무영은 벽에 기대앉은 채 칼로 왼팔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영상을 고통으로 흐리게 만드려는 것 같았다. 칼을 쥔 손은 차마 제 몸을 찌른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무심하게 살을 가르고 찍혀든다. 아이가 가위로 종이를 자를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듯이 그는 칼로 살을 찌르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억과 생각들 전부를 그렇게 난도질할 수 있다면 편할 텐데. 부질없는 한탄의 끝에는 똑같은 영상이 뒤따른다. 진아. 그는 유진과 만난 이래 처음으로 환각과 재회한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유진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껍데기 유진. 껍데기 유진. 기괴한 아이의 목소리로 누군가 놀리듯 노래한다. 귀를 틀어막아봤자 환청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힘없이 그 소리가 고막을 타고 신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내버려둔다. 껍데기 유진. 그의 앞에는 유진이 서 있다. 유진이었던 것이 서 있다. 표면을 둘러싸고 있던 유진의 거죽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다. 녹아내려 바닥에 스며든다. 스며드는 그 순간까지도 다정하게 웃으며, 짜부라지고 으깨지고 녹아서 바닥에 스며드는 껍데기.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한참을 욱욱거리는 신음만 뱉어낸다. 신음은 오열이 되고 매 초마다 새로이 무너지는 억장이 바스러져 가루가 된다. 그 가루들 감정의 찌꺼기들은 끈적끈적한 절망에 뒤섞여 진창을 이루고, 그곳에서 벌레가 기어 나와 속을 뒤집어놓는다.


검은 것, 야! 너 괜찮아?! 검은, 아니, 신무영!


문을 쾅쾅 두드리며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 그러나 걱정스러움으로 들어찬 목소리가 주는 안온함이 그는 되려 두렵다. 죽은 은율의 환각이 사방에서 아른거린다. 저건 껍데기야. 믿으면 안 돼. 그는 생전과 똑같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속삭인다. 저건 껍데기야. 유진과 같은. 언젠가는 잔인하게 닥쳐드는 관계의 종말, 껍데기 아래의 지옥.


쾅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손잡이를 달랑거리며 문은 강제로 열린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백정이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성큼 다가선다. 신무영. 부르는 소리에 잔뜩 움츠러들어 시선을 피하는 이의 손가락이 달달 떨린다. 환청은 노래하고-껍데기 유진, 껍데기 유진-환시는 입모양으로 벙긋거리고-저건 껍데기야-신무영은 고개를 돌리고 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낸다. 요 며칠간 먹은 게 없던 탓이 나오는 거라고는 신물뿐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정말로 그 답지 않은 비명이라고 백정은 멍하니 생각한다. 무력한 아이와 같이 최대한 벽에 바싹 붙어 겁먹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것이, 정말로 그 답지 않았다. 물론 객관적인 실력으로 보면 그에게 신무영은 애송이나 다름없긴 했지만-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런 목소리, 이런 말투로,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백정은 제 시선 하나에도 움찔거리는 이를 부서질 듯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버린다. 신무영은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친숙함이 느껴지지 않는 은율을, 겉모습만 보고 덥석 믿었다가 다시 같은 일을 겪을까 봐. 상궁지조라는 말이 딱 맞았다.


자신만 남은 방에서 신무영은 기묘한 죄책감과 사라지지 않는 공포 속에서 다시 왼팔이며 목을 긁기 시작한다. 금세 배어나온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애써 숨을 고르려 해봐도 제멋대로 벅차오르는 괴로운 사고는 이성의 고삐를 벗어난 뒤다. 그는 어렴풋이 자신의 행동이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나, 정말로 그 남자가 저가 알던 백정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다.


기실 만약 이전이었다면 그는 아무리 낯설게 여겨진다 해도 지금처럼 은율을 밀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드러내놓고 친구니 가족이니 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해도 둘은 나름의 친분이 있었고 남들이 보기엔 괴랄해도 저들끼리는 극히 자연스러운 관계를 성립시켜왔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생판 남으로 여겨진다면 물론 혼란스럽겠지만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무영이라는 사내는 까마득하게 부족한 경험을 이성과 판단력으로 메워올 만큼 썩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니, 자기한테 문제가 생겼다고 결론짓고 혼자 선비탈을 찾아갔으면 찾아갔지 이런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진이 껍데기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그가 발을 들인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불안정하며 잔인한 곳이었고, 신무영은 편집증적인 사고를 버릴 수 없었다. 차차웅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의식 밖에 있는 타인의 신체를 가지고 놀 수 있었고, 누군가는 타인의 정신을 홀려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타인의 기억을 주물러 조작할 수 있었다. 제 얼굴과 의식과 정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자도, 사람 하나를 통째로 카피할 수 있는 자도 있었다. 세계는 허상과 기만의 톱니바퀴 위. 아들처럼 애지중지하던, 정말로 가족이라 생각했던 친한 동생이, 껍데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세상에 없는 걸 보고 있었던 거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긍정이 돌아왔을 때, 껍데기가 벗겨진 얼굴에서 지옥은 시작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와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 확신할 수 없음이란 곧 지옥이나 마찬가지이므로.



The most fearful unbelief is unbelief in yourself.   -Thomas Carlyle



믿음에 대한 두려움은 배신에 대한 두려움, 배신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배신에 의해 상처받을 것임에 대한 인정. 다시 말해 믿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이 믿음의 대상을 사랑하고 그것에게 의지할 것임을, 그리고 자신이 그것의 배신을 버티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신무영은 제 방에 틀어박힌 채 선비탈의 진찰 소견을 곱씹는다. 카그라스 신드롬. 그것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이들에게, 환상을 보일 수 있는 이들에게 그 증후군은 너무나 편리하다. 그가 자신이 알던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경고하는 마지막 보루를, 단순한 병으로 이름 붙이고 지워버리기에. 허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불신은 속에서부터 그를 잠식해가고, 환각은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 그에게 속삭인다. 카그라스 신드롬?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녹아내린 껍데기의 잔해가 입을 뻐끔거린다. 그걸 믿을 거야? 비웃는 목소리가 물어온다.


선비탈이 거짓말을 하는 거면 어쩌려고?


그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벌떡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는다. 쿠당탕하는 소음과 함께 잘못 짚은 의자가 넘어진다. 신무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본다. 거짓이라면, 다 거짓이라면. 그가 선비탈이라는 건 어떻게 믿어? 지금 방문 너머에서 초조해하고 있는 이가 이그나지오라는 건 어떻게 믿어? 그가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는 한순간 제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신무영의 세계는 마침내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붕괴된다.


랑아?


쌍둥이의 이상증세를 감지한 이그나지오가 문을 두드린다. 마음만 먹으면 잠긴 문 하나 따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그는 최대한 제 동생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도 돼? 부드러운 목소리가 물어온다. 그러나 신무영은 그 조곤조곤한 말투조차 낯설다. 핏기가 싹 가셔 희멀거진 얼굴이 멀거니 닫힌 문을 응시한다. 저 문을 열었을 때 너머에 있는 것은 결코 제 쌍둥이 형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두렵다. 버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껍데기 유진, 껍데기 백정. 네 주변에 있는 것들은 전부 껍데기. 집요하게 귓가에 속삭이는 환청을 감당할 수 없다. 덜컥거리는 문 뒤쪽의 형제, 아니 형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 껍데기 이그나지오. 속삭임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껍데기 마루, 껍데기 소라 누나. 껍데기 어머니, 껍데기 아버지.


랑아. 문 열어. 랑아, 랑아!


초조하게 부르다가 이그나지오가 결국 용마를 써서 문의 잠금장치를 풀어버린다. 딸칵하는 소리와 맞물리는 찰칵하는 서늘한 쇳소리. 랑아. 신음처럼 그가 제 형제를 부른다. 그러나 신무영은 더 이상 그를 이그나지오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덜덜 떨리는 주먹에 가만히 포개지는 저와 똑같은 손. 이그나지오의 환각이 다정스레 속삭인다. 믿으면 안 돼. 저건 껍데기야, 랑아. 구현한 리볼버 한 자루로 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다. 랑아. 제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괴로운 목소리로 이그나지오가 속삭인다. 그러나 신무영에게 그것은 여전히 껍데기이다. 아무 의미도 없이 공허한.


신무영?


창백한 얼굴의 이그나지오 뒤로 은율이 머리를 내밀었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곧바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돋는다. 안 돼. 버석거리는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비명이 빠져나간다.


안 돼. 야, 그거 내려놔. 무영아, 무영아!


신무영은, 그 절박한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람의 자취보다도 더 흐리게 미소를 머금는다. 그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단순한 껍데기. 신무영은 확신한다. 이곳은 지옥이구나. 세계는 허상과 기만의 톱니바퀴 위. 그리고 그 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손가락 끝에 걸쳐 있다. 그는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귀청을 뚫을 듯한 발포음을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에 구멍이 뚫린다. 생명을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힘없이 가라앉는다. 짧은 비명과 함께 이그나지오가 허망한 얼굴로 푹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은율이 그를 지나쳐 죽은 이를 끌어안는다. 야속하게도, 축 늘어진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껍데기 아래의 지옥이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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